단테의 달의기억
낡은 광고판 뒤편, T사 로고가 반쯤 벗겨진 자판기가 보인다. 얇은 시곗바늘이 층층이 겹쳐 돌아가는 원통 모양의 본체 아래, 홍보 문구가 새겨져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빌리지 마세요!’ ‛불필요한 시간을 미리 지불하고, 중요할 때 사용하세요!’ 장치 옆에는 손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슬롯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작은 글씨로 주의 사항이 적혀있다. <뭐라고 적혀있는 거야?> “본 장치는, 이용자가 본 장치의 사용 개시에 앞서 특정한 시간적 자원을 선지급하는 행위를 전제로 사용자에게 일시적인 시간 저하 괄호 열고 상기 시간 저하는 T사 변동 시간을 기준으로 산정하되, 하루 또는 일일의 범위는 A사 표준 시간에 따라 측정함 괄호 닫고가 발생하며, 회수된 선납 시간은 본 장치 내부의 보조 적립 장치에 자동 적립 및 축적되어 사용자가 차후 소정의 절차에 의거하여 환급을 요청하거나, 매뉴얼에 명시된 환급 요건이 충족된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에 한하여 사용자의 하루 시간 총량에 별도 셈식에 따라 산출된 가속률 가산분을 합산하는 방식으로 지급되며, 구체적인 반영 시점, 적용 순서 및 제한 조건은 본 장치의 운영 규정에…” “그, 그만. 그만 읽어도 괜찮을 것 같소.” “이거 징수직 놈들이 팔에 달고 다니는 그거 아니냐?”
여유가 있을 때 시간을 넣어두기로 했다. ”원리는 T사 징수직 직원들이 사용하던 건틀릿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관리자님.” ”그런데 이거 제대로 넣은 거 맞아?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단 말이지.” <…….> 느릿느릿하게 말하는 수감자들을 이끌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은 시간을 미리 넣어둘 만한 여유가 없다. 자판기를 이용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